이번 칼럼은 좀 무거운 이야기 일수 있다.
하루 하루를 살면서, 또 그것이 반복 되어지고 나이가 들면서, 깨닫고 느껴지는 것들이 많아지게 된다.
연륜일 수도 있고, 깊이가 더해가는 것일 수도 있다.
먼저는 인간의 삶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
세상의 많은 생물들 중 인간이라는 종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가장 많이 하는 종' 이 아닐까 싶다. 좀 생뚱 맞는가?
그러나 생각해보아라.
우리 일상을 보면, 우리가 어떤 행위들을 할 때 그것들을 면밀히 보면, 거의 97,98%는 사실은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 양치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회사에 출근하고, 또 출근해서 일하는 것 등등
사실은 다 하고 싶지 않은 것 들이다.
모두 다 말이다.
그래서 이런 측면에서는 인간은 불행한 동물 일 수도 있다.
이번에는 우리의 태어남에 대해서 보자.
우리는 보통 '나는 언제 태어났다' 라고 표현을 한다.
그러나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태어나지 않았다. 무슨 소리 일까?
'태어나졌다' 가 맞다.
'태어났다' 는 글, 표현에는 나의 의지가 들어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태어남에 우리의 의지가 들어가 있는가? 그렇지 않지 않나..
우리는' 태어났다' 가 아니라 '태어나졌다' 이다.
태어나졌다. 내게 생이 주어졌다.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그래서 염세적이 되어지거나 수동적인 삶을 살자는 것이 아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얘기해보자.
나의 삶은, 시작은 내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내게 주어져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실의 이유는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실의 이유는,
태어나진, 주어진 내 생명을 내가 끊지 않아서이다.
태어나졌고, 그냥 그대로 이어져 왔을 뿐이다.
내가 선택을 하지는 않았지만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으로 '열심히'와 '행복하게'가 있는 것이다.
이제는 삶의 마감을 들여다 보자.
나는 우리의 삶이 마감을 향해 가는 것들을 보면서 자연의 섭리를 깨닫고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혈기 왕성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2,30대에 삶의 종말이 얼마 안 남았다고 한다면,
그 삶에 대한 미련과 죽음의 공포는 얼마나 크겠는가?
예전에 젊은 사람 대상으로 어르신 체험 프로그램이라는 것이 있었다.
젊은 사람이 모래주머니 같은 것을 손목, 어깨, 허리, 발목 등에 차고 하루를 지내는 것이다.
그것이 어르신들의 실제적 체감, 모습이라는 것이다.
하루씩 체험한 젊은이들의 이구동성은 참 힘들다였다.
우리가 한해 한해를 지내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모든 것이 힘들어 진다.
몸은 무거워지고, 여기가 아프고, 병원도 계속 다녀야하고, 머리도 둔해지고..
그러면서 점점 삶을 살아가는 게 더 힘겨워 지게 된다.
(주의의 시선도 한 몫 하게 된다. 우리는 젊어 체감하지 못하는 시선)
즉 시소나 저울을 비유로 얘기하면
시소(저울)의 한쪽인, 삶을 살아갈 때의 기쁨과 삶에 대한 애착의 무게가 줄게 되면서
반대편에 있는 힘겨움, 고통의 무게가 늘게 된다.
이러면서 삶에 대한 애착, 집착의 끈이 서서히 얇아지게 되는 것이다.
난 이것이 자연의 섭리라고 생각한다.
만약 혈기 왕성한 2,30대에 삶이 끝나야 한다면 그 애착과 집착이 얼마나 크겠는가.
그것이 우리가 늙어가면서, 삶을 살아가는 데의 고통이 커지면서, 그 고통으로 삶의 애착을 조금씩 내려놓게 되고 종말을, 죽음을 좀 더 쉽게 맞이하게 마주보게 되는 것이다.
즉 늙어가면서 삶을 조금씩 포기하는 법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조금씩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한번에는 다 포기하지 못 할 것들을 자연의 섭리는 조금씩 포기를 하게, 포기를 받아들이게 만든다.
이것이 자연의 섭리 중 하나인 것이다.
간단한 두 글자.
그러나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직시'
우리의 삶을 '직시‘ 하기를 바라며 이 칼럼을 쓴다.
2017. 05. 27 담소 대표 오응석